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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 -1 호고주의~고고학의 탄생까지 본문

고고학

[고고학사] -1 호고주의~고고학의 탄생까지

청파소나타 2023. 4. 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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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 -1 호고주의~고고학의 탄생까지 https://ic434.tistory.com/67

[고고학사] -2 문화 진화론~과학적 발굴 방법의 개발까지 https://ic434.tistory.com/68

[고고학사] -3 문화사 고고학 https://ic434.tistory.com/69

[고고학사] -4 과정주의 고고학 https://ic434.tistory.com/70


호고(好古)주의(antiquarianism)

 

 현재에도 과거에 대한 관심으로 박물관 등을 만들듯이, 과거에도 과거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존재했다.

이것이 고고학 연구의 시작점으로, 과거의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으로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다. 다만, 이때는 학문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 이집트 Thutmose 4세(기원전 15세기)

: 기자의 피라미드를 발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스핑크스 발치의 돌에 기록되어있다.

 

- 바빌론 Nabonidus(기원전 6세기)

: 당시보다 2200년 전의 아카노 제국[각주:1]의 도시를 발굴하여 발굴품을 전시하였다. 이때의 경우, 과거의 유물을 찾겠다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최초의 고고학자'라 부르기도 한다.

 

- 르네상스 시대

: 인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과거에 대한 관심 또한 커졌다. 물질문화가 과거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발굴이 시작되었고 특히 그리스, 로마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나, 주로 수집에 집중되었을 뿐 체계적인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중국

기원전 2세기,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사기]를 편찬하며 유적이나 유물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송나라의 학자들이 청동기에 관심을 가졌다는 기술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기록

- 고려 시대

이규보의 [남행원일기]에 고인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지석이라는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한다.' 기능은 알지 못하였으나, 과거인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조선 시대

주먹 도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석기를 벼락이 떨어져 만들어졌다고 해석한다. 다만, 이 경우 석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맞으나 그것이 과거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 추사 김정희

석기를 고대인의 연장, 무기로 해석하였다.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판독한 기록이 남아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김정희가 한쪽 면에 남긴 기록을 볼 수 있다.

경주 곳곳에 위치한 언덕이 신라의 왕릉임을 규명짓기도도 하고, 진흥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기도 한다. 주먹 도끼를 벼락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던 시기에서, 유물의 기록을 바탕으로 과거에 대해 직접적인 조사를 하였다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이런 연구가 지속되었다면 한국 고고학 연구에 많은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기대되나, 아쉽게도 김정희 외에는 이런 인물이 별로 없었다.


19세기 고고학의 탄생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시작되었다. 서양 열강들이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주요 고대 문명의 유적을 발견하였고, 유물을 수집하였다. 

- 하인리히 슐리만: 1871년에 호메르의 [일리아드]의 기록을 바탕으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였다. 훗날, 그가 발견한 것이 트로이 전쟁보다는 나중의 것임이 밝혀지긴 하였으나, 지역적으로는 근접하였다.

이런 초기 고대 문명에 대한 연구는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발굴보다는 도굴에 가까운 성격이었다. 층위 발굴이 아닌 무작정 파서 고물을 수집하는 데 집중하였지만, 그래도 이러한 자료의 축적을 통해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을 끌어냈다는 의의는 있다.

 

 

인류의 태고성에 대한 논쟁

유럽은 기독교가 지배적이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인간의 역사를 받아들였다. 구약성서에 나온 연대를 바탕으로, 기원전 4004년으로 산정하였으며, 성서에 기록된 것보다 인류의 탄생이 먼저라고 보는 견해에는 거부감을 느꼈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직립보행이 처음 등장한 700만 년 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멸종된 동물의 뼈와 인간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가 함께 발견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는 성서에 반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1856년에 독일 Neander계곡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인골이 발견되었고, 토마스 헉슬리가 두개골을 조사하여 유인원적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즉, 인류가 진화에 의해 등장했다는 것이다. 

또한 자연과학 분야에서, 지질학의 동일과정설, 생물학의 진화론이 등장하였다. 

17세기 후반까지는 격변설이 우세하였으나, 18세기에 제임스 허튼이 동일 과정성을 발표하였다. '과거는 현재의 열쇠이다'라는 생각을 토대로,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바탕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을 설명한 것이다. 

다윈에 의해 '진화'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적자생존과 성선택에 의해 생물학적 집단의 유전적인 구성이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생물학적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문화 진화론(cultural evolutionism)'이 등장하였다.

문화 변화는 단순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원시적인 것에서 문명화된 것으로 진화한다는 견해이다. 방향성이 없는 생물학적 진화와 달리 더 발전된 쪽으로 변화한다고 보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도시 국가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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