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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 -2 문화 진화론~과학적 발굴 방법의 개발까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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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진화론
-단선 진화론(unilinear evolution)
모든 사회가 동일한 단계를 거쳐서 진화한다는 이론이다. 문명이 발달하는 과정이 정해져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서양 문명과 달리 원시적인 특성을 가진 문명은 '열등한 문명'이라 보았다. 민족주의적인 사상이었다.
삼시대 체계 (Three-age system)
1816년, Thomsen이 국립 코펜하겐 발굴관의 전시를 위해 분류한 체계로, 인류의 역사를 석기시대 - 청동기시대 - 철기시대 로, 사용하는 도구의 재료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지역에 따라 예외적인 사례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지역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후 Lubbock이 석기를 타제석기와 마제석기로 구분하여,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로 명명하였다. 1870년대, 중석기시대의 개념도 등장하였다.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시대로, 홀로세에 접어들며 기후가 따뜻해져 농경이 시작되는데 이때에도 여전히 구석기적인 수렵채집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시기이다.
구석기 시대에는 주로 주먹도끼, 찍개 등의 대형 석기를 사용하였다면, 중석기 시대에는 비교적 작은 석기들을 사용하였다. 아는 기후가 따뜻해짐에 따라 대형 동물들이 멸종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신석기 시대에는 마제석기를 사용하며 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타제석기도 지속적으로 이용하였다.
19세기 말부터는 초기 문명에 대한 조사가 다시 이루어지고, 더 과학적인 발굴과 방법론들이 등장하였다.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 발굴
투탕카멘의 아버지인 아케나토 왕은 갑자기 다신교가 아닌 일신교를 믿었다. 이에 반발이 많아 3년 만에 죽었고, 투탕카멘이 어릴때 즉위하게 되었다. 투탕카멘은 짧은 시기동안 통치한 후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 때문에 부장품 자체는 많지 않은 편이나, 도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명하다. 투탕카멘은 신왕국 시대의 왕으로, 신왕국 시대에는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고 왕가의 계곡을 조성하였다. 이때문에 입구를 찾기도 힘듦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왕묘가 도굴당했다. 투탕카멘의 미라 또한 잘 보존되어서 미라를 바탕으로 얼굴도 복원하였다. 다리 한쪽에 치명적인 골절상이 확인되어, 항생제 등이 없었던 당시에 이런 요인으로 일찍 사망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 이라크 우르 왕묘의 발굴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의 도시 국가 중 하나이다. 1922년~1934년에 걸쳐 레너드 울리가 2000기 이상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많은 부장품과 순장이 확인되었다. '죽음의 구덩이'라 이름 붙여진 곳도 있는데, 순장이 매우 많이 되었으며 주변에서 그릇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독살로 추정한다.
이러한 순장의 기록과 함께 매장된 각종 보물들은, 기원전 2000년인 당시 계급화가 심한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푸아비 여왕의 무덤. 처음에는 순장자로 추정하였으나 실린더의 기록을 보아, 여왕의 무덤이었음을 확인해다. 하프에 길가메시 서사시로 추정되는 기록이 남아있었으며, 하프에 청금석으로 만들어진 장식이 달려있었다. 이 지역은 청금석이 나외 않았으므로,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악기가 나오므로 문화 활동이 활발했다는 것도 추정할 수 있다.
-페루 마추픽추의 발견.
1911년 하이럼 빙엄이 발견한 잉카 무명이다. 문자가 발견되지 않아, 기능은 잘 알지 못한다. 인골을 분석한 결과 다양한 지역의 기생충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특정한 이유로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산 것으로 추정한다. 대대로 이 자리에서 산 것이 아닌, 별장 등의 특수 목적으로 잠시 산 것으로 추정한다. (고산지에 있어 물이나 음식을 지속적으로 구하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고인류의 발견
1868년 프랑스 남서부에서 크로마뇽인이 발견되었다. 이는 최초로 발견된 현생 인류이다. 인골 주변에서 각종 패각이나 동물의 이빨 등이 함께 발견되어, 인위적인 무덤을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장례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내세에 대해 사고를 했다는 의미이고, 상징적, 추상적인 것을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1891년, 인도네시아 자바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발견되었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와 상당히 유사한 형태로, 진화론적으로 중요한 증거였다. 인류와 유인원의 특성을 공유하는 모습들이 발견된 것이다.
(cf. 필트다운인 사건: 1912년에 찰스 도슨이 영국 필드다운에서 고인류 화석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훗날 조사해보니, 오랑우탄의 턱뼈와 침팬지의 치아를 합쳐 만든 조작된 사거닝었다. 코난 도일이 범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1921년, 호모 에렉투스인 베이징원이 발견되었고, 이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동아시아까지 이동한 증거이다.
1924년, 아프리카에서 타웅 베이비가 발견되었다. 이는 호모 속이 아닌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1957년, 네안데르탈인인 샤니다르인이 서남아시아 이라크에서 발견되었다. 주변에서 꽃가루가 확인되어, 인위적으로 장례를 치른 흔적이라 추정한다. 다만, 주변에서 그냥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하므로 명확한 증거라 볼 수는 없다. 발견된 인골에서 치명상을 입은 후 아문 흔적이 있으므로, 돌봄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의식적으로 발전된 모습.
-과학적인 발굴 방법의 개발
1784년, Thomas Jefferson(미국의 3대 대통령)은 버지니아 인디언의 무덤을 발굴하였다. 이는 최초의 과학적인 발굴로, 트렌치를 두어 발굴을 진행하였다. 츠에 따라 인골의 상태를 조사하여, 반복적으로 무덤을 이용했음을 추정한다.
- 19세기 말
피트-리버스: 장군 출신으로, 군대식 조직을 바탕으로 유물 출토의 모든 과정을 기록하였다. 현대 고고학의 조사 과정이 거의 이때 마련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측량과 도면 작성은 물론, 보고서까지 발간하였다.
플린더스 페트리: 영국의 이집트 고고학자로, 발굴 과정의 기록과 보고서 완간을 강조하였다.
휠러: 방격법을 창안하여, 바둑판식으로 구획을 하여 사방의 층위를 남기고 발굴하는 방식으로 인도 주요 유적들을 발굴하였다.
알프레드 키더: 발굴자 혼자 전체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닌, 유물과 인골 분석의 전문가를 활용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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